재일교포인 일본인과 국적은 한국이나 한국에 적대적 감정을 가진 재일한국인 이 두 부류와 함께 재일조선인, 즉 북한 측 국적을 가진 동포도 다 우리가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데올로기를 따지기는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는 너무 구시대적 사고이다. 또
재일한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의 생활상태
재일조선인은 거의 대부분이 도일이전에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근대적인 산업노동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본에서 하층노동력으로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즉 일본인이 기피하는 부문에 종사한 것이다. 직종을 크게 나누어보면, 토
조선노동공제회가 문화적 성격의 기관지 발행
『적기』 - 이르크츠크의 기관지
『공산』,『화요보』 - 상해의 이르크츠크파가 발행
『개벽』,『조선지광』,『신천지』,『신생활』 -사회주의 이론 소개 잡지
『무산자』, 『신생활』- 무신자동지회 기관지
신사상연구회 - 「조선일보」, 「시대일보
운동”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되었고 농민과의 연결이 없었던 점을 들어, 그 실패가 필연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갑신정변 부분의 집필자 유문화는 근로대중만이 진정한 변혁주체라 보고 김옥균 등의 활동을 과거 당쟁의 연장선상에서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는 식민지
조선사(朝鮮史)』(1932)의 편찬이 대표적이었다. 또한, 총독부의 지원 하에 청구학회,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 등 일본인 관학자의 조선사연구 조직이 체계화되어 한말에서 일제하에 이르는 조선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방대한연구를 추진하였다. 그 핵심내용은 조선인을 회유하고 ‘황국신민화’의
식민지 기간 중, 인물 ‘박경원’의 행적을 중심으로 시대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박경원이 본격적으로 일본 도쿄 가마다에 있는 일본비행학교를 정식으로 입학한 1925년부터의 시기를 말할 수 있다. 1920년대는 일제의 ‘문화정치’와 식민지자본주의의 전개를 특징으로 갖는다. 문화정치는 3.1운동
재일동포에 대한 정의
재일동포는 자신의 조국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표현하는 용어 또한 다양하다.
재일한국인․조선인: 한국 국적자와 조선 국적자를 함께 지칭할 경우
조선인: 식민지시대재일한국인: 한국국적 소지자
재일조
일본 사회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로서는 일본의 차별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한국국적을 유지해 나갈 의미가 크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길이고 나아가서는 21세기란 국제화시대에 있어서 내외국인 평등
,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자결주의에 의해서 우리의 자결권을 행동으로써 주장하고, 또 국제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고 확신하여 독립 만세운동의 선두에 섰다는 것은 그 절규가 그만큼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